
류사눌 묘
柳思訥 墓
인천 서해구 경서동
단체로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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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 인원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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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학년
- 초3 ~ 고3 (자동 추천)
- 시대
- 정보 없음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 지역
- 인천광역시 서해구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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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인 문숙공 류사눌(1375∼1440)의 묘소이다. 류사눌(1375~1440)의 자는 이행(而行), 본관은 문화(文化), 시호는 문숙(文肅). 유식(柳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안택(柳安澤)이고, 아버지는 전농정(典農正) 유임(柳臨)이며, 어머니는 권숙(權肅)의 딸이다. 조선조 초기 16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8세 때인 태조 2년(1393년)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합격해 좌정언, 이조·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태종 7년 (1407)에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태종 9년(1409)에 사간원의 집의로서 태종의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태종비 문경황후의 동생들)을 탄핵하다가 황해도 안악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물러나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가 태종 16년(1416)에 지신사(도승지)로서 소합유를 진상하는데 잘못을 저질러 다시 안악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서 경상도 도관찰사가 된 후 함경도 도순문사, 강원도 도관찰사 등을 거쳐 세종 5년(1423)에는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 후 세종 10년(1428)에는 예문관대제학으로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종 14년(1432)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류사눌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 밑에서 학문에 힘써 경전에 밝고 문장에도 능했다. 특히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예문관 대제학 재직시에는 악학제조를 겸하여 서문을 찬하기도 하였으며, 세종 16년(1434)에는 를 찬하여 에 싣는 등 박연과 더불어 아악을 정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이 묘역에는 문화 류 씨 일문의 묘 수기가 있는데 류사눌 묘 앞에는 훨씬 후대에 설치한 상석, 문인석과 성구용이 찬한 묘비가 서있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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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검색 Open API (공공누리, 유형 확인 필요) · 가져온 날: 2026. 10. 25.